카테고리 없음

추억, 나무, 비

qaz7749 2024. 10. 15. 03:29

추억, 나무, 비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순간은 사소하고, 어쩌면 쉽게 잊힐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 중 어떤 것은, 뜻밖의 방식으로 우리 삶에 뿌리 내리고 있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 시원한 빗방울처럼 마음을 적신다. 오늘은 그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오래된 나무처럼 한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주는 존재가 되었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 집 마당에 있는 큰 나무 밑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 나무는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 같았다. 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그네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자주 나무의 연륜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이 나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여기 있었단다.” 할머니의 말에 나는 나무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 때부터 나는 나무가 단순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이 아니라, 우리 가족과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마당에 나가 나무 밑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곤 했다. 나무 잎사귀에 스며든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며 만드는 리듬은 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그 빗소리는 마치 자연이 나에게 속삭이는 이야기 같았다. 비는 그렇게 나무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비가 나무에 닿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세상과의 연결성을 느꼈다. 나무는 비를 맞고, 나는 그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특히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나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뛰었다. 온몸이 젖어버렸고, 나무 아래에 도착했을 때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그 나무 밑뿐이었다. 거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는 비가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나무가 나에게 얼마나 큰 안식을 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안심했고, 나무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중학생이 되어 더 이상 그 나무 밑에서 놀거나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학업에 치이고, 친구들과의 약속이 많아지면서 나무는 점점 내 관심 밖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그 나무가 생각났다. 나무와 함께했던 추억들은 비가 내리는 날에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무언가에 지치거나 힘들 때마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해 잠시 쉬던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렇게 나무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비와 나무, 그리고 추억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의 감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는 할머니 집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할머니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할머니 댁을 찾았다.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예전과 변한 것이 없는 그 나무를 보았다.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빗소리는 여전히 나무 잎사귀 사이에서 맑게 울려 퍼졌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할머니와 나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무는 나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는 존재였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흔히 사소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지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내가 힘들 때마다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비는 나무에게 생명을 주었고, 나무는 나에게 쉼터를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추억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긴 여행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뒤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어떤 기억들이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비가 내리는 날, 나무 아래에서 잠시 멈춰서서 나를 지켜주는 그 무언가를 생각해보자. 그 추억들이 우리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을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