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의 기억
사라진 것들의 기억
어릴 적, 집 안 곳곳에는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할머니가 해주던 따뜻한 국물이었다. 어머니는 바쁘셨고, 아버지는 일찍 집을 떠나셨기 때문에 나와 할머니는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겨울이면 할머니는 손끝이 쩍쩍 갈라져도 끓이시던 된장국을 잘 만들었다. 국물이 얼큰하고 구수한 냄새가 가득 퍼져 방 안을 가득 메우면, 나는 그 냄새 속에서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국물을 떠먹을 때면,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국물의 맛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할머니는 더 이상 국을 끓여주지 않으셨고, 나는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꿀 수 있을지 몰랐다. 할머니가 떠난 후, 집 안에서 느껴지던 그 구수한 냄새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록 내가 그 맛을 완전히 다시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 국물 속에서 느껴졌던 사랑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국물의 맛은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그 맛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나중에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던 공원도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이제 내가 자주 가는 장소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와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대화보다는 손을 잡고 걷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그때의 아버지의 말과 그 손끝의 온기는 이제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만 남아 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시던 농담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 공원에서 걸었던 발자국 소리만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도 아름다웠는지, 그 순간은 왜 그렇게 특별했는지, 이제는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우리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변은 점차 변하고, 그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 생겨난다. 사라져간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도 결국에는 사라진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이나, 자주 갔던 길 위의 풍경, 그때그때의 감정들까지도 하나씩 사라져간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그것을 되찾으려 해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나를 만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국물의 맛, 그때의 아버지와의 대화, 그리고 할머니의 웃음소리까지. 사라졌다고 해서 그 기억이 더 이상 내 삶의 일부가 아니란 법은 없다. 오히려 사라진 것들이 내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순간들이 된다. 그리움은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다. 사라진 것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그때의 기쁨을 다시 느끼고, 그리움 속에서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그것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돌아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라진 것들 역시 결국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