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시간
나는 종종 나무 앞에 서서 시간을 생각한다.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시간을 떠올릴 때면 자연이 그리는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 1년은 매번 새로운 시작으로 다가오지만, 나무에게는 매년 고스란히 흡수되어야 할 시간의 흔적일 뿐이다. 그들이 짊어진 나이테는 한 해의 성장과 정체, 시련과 휴식을 모두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시간들을 한데 모아 오늘의 나무를 만들어 낸다.
어느 공원에서 그랬던가. 오래된 나무 앞에 멈춰 섰던 기억이 있다. 그 나무는 아마도 수백 년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나무 껍질을 가만히 손끝으로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나무는 여기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오랜 세월 지켜보았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도시가 변해가고,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는 그 모든 변화를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왔다. 그리하여 매년 비슷해 보이는 이 나무도 실은 저마다 다른 나이테를 쌓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기록해온 것이다.
나무의 시간을 생각할 때면 불현듯 우리의 시간도 그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흔히 시간을 쫓아가야만 한다고 여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귀중하기 때문에 낭비할 수 없는 자원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스케줄을 짜고, 틈틈이 목표를 설정하며 분주하게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런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반드시 시간을 쫓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 속에 천천히 몸을 맡기는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어떻게 시간을 받아들일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잎이 나고, 햇볕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천천히 자라나간다. 그러나 한 해가 끝났을 때 나무가 내놓는 것은 단 한 겹의 나이테일 뿐이다. 그 나이테는 다른 어느 해와도 똑같지 않으며, 그 자체로 그 해의 풍성함과 고난, 비바람을 겪은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같은 하루를 살아가도 모두가 다른 경험을 쌓고, 고유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어느 누가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며 그것이 지나온 세월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겪은 시간의 흐름과 경험을 남에게 온전히 전하기는 어렵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요즘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정말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는 종종 바쁜 일상에 치여 '오늘'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매일의 시간이 금세 과거로 흘러가고 만다. 내가 보기에 나무는 시간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바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서 시간을 흡수하며 내적으로 성장하고, 계절을 따라 새로운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그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나무처럼 하루하루를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게 하루를 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만의 나이테를 쌓아가게 되지 않을까? 무언가 성취해야만 의미 있는 하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어느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 해를 충분히 기록하고 다음 해를 맞을 준비를 한다. 그런 나무를 볼 때마다, 나도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찾고, 지금의 나를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하루의 끝에 잠시 멈추어 오늘을 되새겨보는 습관을 들였다. 하루 동안 겪은 크고 작은 일들,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 그리고 내 마음에 남은 감정을 천천히 되돌아본다. 그것이 대단하거나 특별한 순간이 아니더라도, 그 하루를 내 안에 새기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쌓아온 나이테 위에 새로 얹힌 겹이다. 그렇게 쌓인 나이테가 모여 언젠가는 단단한 나무가 될 것이란 기대가 든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하지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루를 살아가면서 천천히 자신을 쌓아가는 일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나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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